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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문속 독립운동]⑤ [단독 발굴] 임시정부 도운 일본인 있었다!
입력 2019.08.15 (07:01) 수정 2019.08.15 (10:25) 취재K
[판결문속 독립운동]⑤ [단독 발굴] 임시정부 도운 일본인 있었다!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임정 자금 마련 위해 권총 전달한 일본인 '나카지마'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은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암살하려는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습니다. 영화에는 상해에서 경성으로 잠입한 주인공들을 돕는 일본인 '기무라'가 등장하는데요. 첫 만남에서 "조선독립 찬성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가 하면, 목숨을 건 활약으로 암살 작전에 기여합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물론 허구였지만,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인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KBS는 임시정부 지원자금 모금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판결문에서, 모금 활동을 도운 혐의로 함께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인의 이름을 최초로 확인했습니다. 이 일본인의 이름은 '나카지마'로, 그는 임시정부 지원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 권총을 마련해 준 일본인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지원자금' 모금했던 광복회, 권총으로 부호들 협박

권총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곳은 '광복회'였습니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의 주요 활동 목적은 당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 확보였습니다. 이를 위해 무역상과 곡물상을 운영해 돈을 벌거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광산을 습격하고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털기도 했습니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한국 내 부호들에게 반강제로 모금했는데, 이때 거금을 내놓게 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요인이라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광복회 요인들은 가장 효과적인 물증으로 권총을 선택한 겁니다.


"금강산 여행하는 데 필요하다"며 권총 구입 허가원 제출

1920년 박용선과 조한명, 이동찬 등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던 광복회원들은 임시정부 지원자금을 요구할 대상으로 서울 서린동에 거주하던 엄홍섭을 지목했습니다. 조한명이 권총을 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권총을 정상적으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0년 7월 15일 조한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인 나카지마에게 '한국인은 권총을 구입할 수 없으니 나카지마 이름으로 구입허가를 받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호신용으로 갖고 있던 권총을 분실했다고 신고하고 다시 구입 허가를 받자'는 작전도 제안했습니다.

일주일 뒤인 7월 22일 나카지마는 용산경찰서에 '금강산을 여행하는 데 필요하다'며 호신용 권총 1정과 실탄 30발을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허가원을 제출했습니다. 명치정1가(지금의 명동)에 있는 총포화약상 다키가와에게 구입하겠다며 구체적인 구입처도 밝혔습니다. 신청 이틀 만인 24일 허가를 받았고 다음날인 25일 미국제 6연발 권총 1정과 실탄 20발을 구입해 서린동에서 조한명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권총을 들고 자금 모금에 직접 나서는 임무는 경북 경산 출신의 허병률이 맡았습니다. 그는 1917년부터 광복회 활동을 하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 열성적으로 나섰고, 자산가들로부터 모금한 8천 원을 직접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국은행에서 제공하는 화폐가치계산에 따르면 쌀 가격 기준지표로 1920년 당시 8천 원은 지금의 5천7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애국금 납입통지서 영수증에 해당하는 ‘애국금 수합위원 신표’애국금 납입통지서 영수증에 해당하는 ‘애국금 수합위원 신표’

첩보영화 같았던 임시정부 지원자금 모금

1920년 8월 9일 허병률과 엄홍섭의 만남은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습니다. 허병률은 흰색 양복을 입은 채 권총과 탄알 6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이름으로 찍힌 '애국금 납입통지서 영수증'을 갖고 종로 전차 정류장에서 엄홍섭을 기다렸습니다. 엄홍섭을 정류장까지 유인하는 임무는 그와 안면이 있던 조한명이 맡았습니다.

조한명은 산책을 하자며 엄홍섭을 정류장까지 데려온 뒤 홀연히 사라졌고, 허병률은 엄홍섭을 미행한 끝에 종로2가 청년회(지금의 YMCA 건물) 앞에서 붙잡아 '고위 관리인데 조사할 것이 있다'며 장교정(현재 중구 장교동)의 중국요리점 '화안'의 한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허병률은 권총과 탄환을 탁자 위에 꺼내 놓으며 자신을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자금 모집원이라 밝히고, 1만 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엄홍섭은 '아직 부모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여서 그와 같은 큰돈을 낼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허병률은 대한민국 재무부의 금전 모집 장부를 꺼낸 뒤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판결문에는 기록돼있습니다.

"이 권총은 내 몸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나는 생명을 알지 못하는 자이니 네가 이 장부에 기부금을 쓰거나 또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쓰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해라. 만약 쓰지 않으면 나는 자유행동을 취하겠다"

이에 엄홍섭은 장부에 일주일 뒤인 '같은 달 16일까지 2만 원(현재의 1억 4천만 원에 해당)을 내놓겠다'고 쓴 뒤 서명했습니다.


허병률·박용선·조한명·이동찬은 징역 5년, 나카지마는 벌금 100원 선고

하지만 누군가의 제보로 모금은 결국 실패하고 광복회 요인 4명과 나카지마는 모두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엄홍섭은 경찰 조사에서 "(허병률이) 죽음이라는 한 글자를 머리에 두고 있는 자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너무 무섭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은 마음이 들고, 후에도 역시 가슴이 두근거려 병에 걸릴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경성지방법원이 이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강도와 사기, 총포 화약류 단속령 위반이었습니다. 허병률, 박용선, 조한명, 이동찬에게는 각각 징역 5년을, 나카지마에게는 벌금 100원을 선고했는데 나카지마의 강도, 사기 혐의는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된 '2만 원 협박 사건'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2만 원 협박 사건'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 됐습니다. '허병률이 일본인 나카지마의 도움으로 권총을 구입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 검거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났던 이듬해에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도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나카지마 이외에도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독립운동을 돕거나 직접 활동을 했던 일본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 유학생들을 변론했던 변호사 후세 다츠지, 그리고 독립투사 박열의 아내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가네코 후미코가 주로 언급돼 왔습니다.

하지만 나카지마는 이들과 달리 그야말로 평범한 일본 시민이었습니다. 한국인이었던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벌금형까지 감수해야 했음에도, 사진 한 장 없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일제가 남긴 방대한 판결문 가운데 '스치듯'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기꺼이 떠맡았던 임무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광복 74주년을 기념하는 오늘만이라도 '스치듯' 되새기면 좋을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 [판결문속 독립운동]⑤ [단독 발굴] 임시정부 도운 일본인 있었다!
    • 입력 2019.08.15 (07:01)
    • 수정 2019.08.15 (10:25)
    취재K
[판결문속 독립운동]⑤ [단독 발굴] 임시정부 도운 일본인 있었다!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 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임정 자금 마련 위해 권총 전달한 일본인 '나카지마'

2015년 개봉한 영화 '암살'은 조선주둔군 사령관을 암살하려는 의열단원들의 활약을 박진감 넘치게 그려냈습니다. 영화에는 상해에서 경성으로 잠입한 주인공들을 돕는 일본인 '기무라'가 등장하는데요. 첫 만남에서 "조선독립 찬성합니다."라고 인사를 하는가 하면, 목숨을 건 활약으로 암살 작전에 기여합니다. 영화의 스토리는 물론 허구였지만, 독립운동을 도운 일본인은 실제로 존재했습니다.

KBS는 임시정부 지원자금 모금 활동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판결문에서, 모금 활동을 도운 혐의로 함께 유죄 판결을 받은 일본인의 이름을 최초로 확인했습니다. 이 일본인의 이름은 '나카지마'로, 그는 임시정부 지원자금 마련을 위해 직접 권총을 마련해 준 일본인이었습니다.


'임시정부 지원자금' 모금했던 광복회, 권총으로 부호들 협박

권총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곳은 '광복회'였습니다. 1915년 7월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의 주요 활동 목적은 당시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 확보였습니다. 이를 위해 무역상과 곡물상을 운영해 돈을 벌거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광산을 습격하고 세금을 수송하는 우편마차를 털기도 했습니다.

1919년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한국 내 부호들에게 반강제로 모금했는데, 이때 거금을 내놓게 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요인이라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광복회 요인들은 가장 효과적인 물증으로 권총을 선택한 겁니다.


"금강산 여행하는 데 필요하다"며 권총 구입 허가원 제출

1920년 박용선과 조한명, 이동찬 등 서울, 경기 지역에 거주하던 광복회원들은 임시정부 지원자금을 요구할 대상으로 서울 서린동에 거주하던 엄홍섭을 지목했습니다. 조한명이 권총을 구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권총을 정상적으로 구입하기 위해서는 일본인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0년 7월 15일 조한명은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인 나카지마에게 '한국인은 권총을 구입할 수 없으니 나카지마 이름으로 구입허가를 받아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면서 '호신용으로 갖고 있던 권총을 분실했다고 신고하고 다시 구입 허가를 받자'는 작전도 제안했습니다.

일주일 뒤인 7월 22일 나카지마는 용산경찰서에 '금강산을 여행하는 데 필요하다'며 호신용 권총 1정과 실탄 30발을 구입할 수 있게 해달라는 허가원을 제출했습니다. 명치정1가(지금의 명동)에 있는 총포화약상 다키가와에게 구입하겠다며 구체적인 구입처도 밝혔습니다. 신청 이틀 만인 24일 허가를 받았고 다음날인 25일 미국제 6연발 권총 1정과 실탄 20발을 구입해 서린동에서 조한명에게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권총을 들고 자금 모금에 직접 나서는 임무는 경북 경산 출신의 허병률이 맡았습니다. 그는 1917년부터 광복회 활동을 하며 군자금 모집 활동에 열성적으로 나섰고, 자산가들로부터 모금한 8천 원을 직접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한국은행에서 제공하는 화폐가치계산에 따르면 쌀 가격 기준지표로 1920년 당시 8천 원은 지금의 5천7백만 원에 해당합니다.)

애국금 납입통지서 영수증에 해당하는 ‘애국금 수합위원 신표’애국금 납입통지서 영수증에 해당하는 ‘애국금 수합위원 신표’

첩보영화 같았던 임시정부 지원자금 모금

1920년 8월 9일 허병률과 엄홍섭의 만남은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했습니다. 허병률은 흰색 양복을 입은 채 권총과 탄알 6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부 이름으로 찍힌 '애국금 납입통지서 영수증'을 갖고 종로 전차 정류장에서 엄홍섭을 기다렸습니다. 엄홍섭을 정류장까지 유인하는 임무는 그와 안면이 있던 조한명이 맡았습니다.

조한명은 산책을 하자며 엄홍섭을 정류장까지 데려온 뒤 홀연히 사라졌고, 허병률은 엄홍섭을 미행한 끝에 종로2가 청년회(지금의 YMCA 건물) 앞에서 붙잡아 '고위 관리인데 조사할 것이 있다'며 장교정(현재 중구 장교동)의 중국요리점 '화안'의 한 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허병률은 권총과 탄환을 탁자 위에 꺼내 놓으며 자신을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독립자금 모집원이라 밝히고, 1만 원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엄홍섭은 '아직 부모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여서 그와 같은 큰돈을 낼 수 없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허병률은 대한민국 재무부의 금전 모집 장부를 꺼낸 뒤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판결문에는 기록돼있습니다.

"이 권총은 내 몸을 지키기 위한 것인데 나는 생명을 알지 못하는 자이니 네가 이 장부에 기부금을 쓰거나 또 쓰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쓰지 않거나 어느 쪽이든 마음대로 해라. 만약 쓰지 않으면 나는 자유행동을 취하겠다"

이에 엄홍섭은 장부에 일주일 뒤인 '같은 달 16일까지 2만 원(현재의 1억 4천만 원에 해당)을 내놓겠다'고 쓴 뒤 서명했습니다.


허병률·박용선·조한명·이동찬은 징역 5년, 나카지마는 벌금 100원 선고

하지만 누군가의 제보로 모금은 결국 실패하고 광복회 요인 4명과 나카지마는 모두 경찰에 검거됐습니다. 엄홍섭은 경찰 조사에서 "(허병률이) 죽음이라는 한 글자를 머리에 두고 있는 자라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너무 무섭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같은 마음이 들고, 후에도 역시 가슴이 두근거려 병에 걸릴 것과 같은 마음이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경성지방법원이 이들에게 적용한 죄목은 강도와 사기, 총포 화약류 단속령 위반이었습니다. 허병률, 박용선, 조한명, 이동찬에게는 각각 징역 5년을, 나카지마에게는 벌금 100원을 선고했는데 나카지마의 강도, 사기 혐의는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동아일보에 대서특필된 '2만 원 협박 사건'

이 사건은 당시 동아일보에 '2만 원 협박 사건'이란 제목으로 대서특필 됐습니다. '허병률이 일본인 나카지마의 도움으로 권총을 구입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다 검거되었다'는 내용이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났던 이듬해에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도움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나카지마 이외에도 일제의 식민통치 기간 독립운동을 돕거나 직접 활동을 했던 일본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1919년 2.8 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 유학생들을 변론했던 변호사 후세 다츠지, 그리고 독립투사 박열의 아내이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가네코 후미코가 주로 언급돼 왔습니다.

하지만 나카지마는 이들과 달리 그야말로 평범한 일본 시민이었습니다. 한국인이었던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벌금형까지 감수해야 했음에도, 사진 한 장 없이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일제가 남긴 방대한 판결문 가운데 '스치듯'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기꺼이 떠맡았던 임무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광복 74주년을 기념하는 오늘만이라도 '스치듯' 되새기면 좋을 이름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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