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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설’이 만들어낸 역사
입력 2019.12.14 (07:07) 취재K
‘대설’이 만들어낸 역사
한차례 미세먼지는 지나갔다.

하지만 올겨울에도 큰 눈이 있을지, 만일 있다면 언제 있을지 걱정도 돼서 포털 검색창에 '12월 날씨'를 쳐 봤다.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기온이 크게 떨어져 서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릴 때가 있겠습니다'

겨울이 되면, 폭설로 재난이 닥칠까 봐, 그래서 다치는 사람이나 재산 피해가 있을까 봐 걱정하는 현재의 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 역사 속에는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이른바 '기설제'를 지냈던 때도 있었다.

포털 검색창에 '기설제'를 쳐봤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속된 농경의례의 하나'라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눈이 와야 할 시기에 눈이 오지 않는 것 또한 천재라고 믿어 음력 11월과 12월에 기설제를 지냈다고 한다. 눈이 오는 횟수 또는 눈이 내린 양에 따라 이듬해가 풍년일지 흉년일지를 예측했기 때문에 눈을 내려 달라고 하늘에 제를 올린 것이다.

큰 눈으로 인해 빚어졌던 역사적 이벤트들이 어떤 것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 이번엔 포털이 아니라 전자책으로 된 각종 역사 실록 등을 뒤져봤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과 백제 아신왕 사이의 그 치열했던 일진일퇴의 기록 속에, '폭설' 또는 '대설' 즉 큰 눈의 극적인 역할이 나온다.

출처 : 삼국사기(동서문화사 출판)출처 : 삼국사기(동서문화사 출판)

위 기사는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에 나온 아신왕에 관한 것이다. 아신왕 4년(서기 395년) 가을 8월, 왕이 부하 진무 등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 했는데, 고구려 왕 담덕(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광개토대왕이다)이 친히 군사 7,000명을 이끌고 나와 맞서 싸워 백제군 8,000명이 죽었다는 기사가 먼저 나온다. 뒤이어 겨울인 11월에는 아신왕이 복수를 위해 다시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진군하는데, 이때 '회대설', 즉 큰 눈을 만나 얼어 죽는 병사들이 많으므로 결국 되돌아가 지친 군사들을 위로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광개토대왕비'에는 새겨져 있는, 위 기사의 바로 다음 해, 즉 서기 396년의 이벤트까지 한 번 알아보자.

서기 396년, 광개토대왕은 바로 전 해에 고구려를 침범하려 했던 아신왕이 괘씸했는지 수군 수만 명을 배에 싣고 서해를 가로질러서 한반도에 있던 백제의 수도 한성을 침공한다. 아신왕은 고구려군이 수군까지 동원해 쳐들어올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굴복, 성문을 열고 나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만일 아신왕이 바로 그 전 해에 큰 눈만 만나지 않았다면 고구려 원정에 성공해 반대로 광개토대왕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삼국사기에 보면, 이렇게 큰 눈을 만나 회군을 할 수밖에 없어서 대업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기사가 또 있다.


예를 들어 위 기사처럼 고구려 문자왕은 백제를 침공했다가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져 결국 되돌아와야 했고,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역시 낙랑을 치다가 역시 큰 눈을 만나 바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큰 눈 덕분에 위기에서 빠져나온 경우도 있다.


위 기사는 고구려 제 2대 왕인 유리왕(주몽의 아들)때의 일이다.

유리왕 14년(기원전 6년) 당시 강국이었던 부여왕 대소가 유리왕에게 태자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결국 보내지 않았다. 분노한 대소는 그해 겨울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침공해 왔지만, 큰 눈을 만나 병사들 중 동사자가 나오자 퇴각하고 만다.

큰 눈이 태자도 구하고(태자는 6년 뒤 죽어서, 유리왕의 뒤를 이을 운명은 아니었다) 나라도 구하고 결국 왕 자신도 구한 셈이다.

신라에서 '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에 '이사금'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적도 있는데(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기원후 3세기 내해이사금 때에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사금에 대한 연민이 생길 정도로 재난이 잇따랐다.

아래 기사는 내해이사금 당시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내해 이사금 즉위 31년(서기 228년) 봄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7월에야 비가 와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창고의 곡식을 풀었다고 한다. 그해 10월에는 감옥에 들어가 있는 죄수 중에 죄질이 가벼운 사람들은 석방한다. 아마도 장기간의 가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3년 뒤 가을에는 지진이 발생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큰 눈이 내려 쌓인 눈의 깊이가 다섯 자, 즉 1m 50㎝나 됐다고 한다.

가뭄에 지진, 그리고 얼마 있다가 폭설까지... 이사금은 민심을 달래러 다니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고 과로를 해서였을까? 폭설이 내렸던 그다음 해 3월, 내해이사금은 죽고 만다.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12월의 어느 날 내렸던 큰 눈도, 당시 왕이었던 인조의 운명을 갈랐다.


우리는 2017년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왕이었던 인조. 그리고 그의 신하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난을 겪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들이 청군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농성했던 기간은 47일간이었다. 다행히 이 영화 속에서는 왕과 신하들뿐 아니라 당시 민초들의 뼈저린 고통이 한겨울 매서운 추위와 쌓인 눈의 이미지 속에 잘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인조는 원래 남한산성에 오래 머무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1636년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급보를 받고 인조는 무조건 강화도로 도망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미리 선점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마음을 바꿔 향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었다.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에 들어온 인조와 신하들은 또다시 마음이 바꿔 다시 강화도로 가기로 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날인 12월 15일 새벽, 인조는 말을 타고 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하기 시작하는데, 그땐 이미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조가 탔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고 한다.

결국엔 말에게 채찍까지 휘둘러, 끝내 말로 하여금 몇 걸음 떼게 했지만, 눈보라로 꽁꽁 얼어붙은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말이 넘어지고 말았다고 한다.(출처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제12권)

결국, 인조와 신하들은 시간이 지체돼서 그랬는지 강화도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만일 눈이 내리지 않아 강화도행이 성공했다면, 인조가 강화도로 갈 것을 예상하고 길목을 막고 있던 청군에게 틀림없이 붙잡혔을 것이라고 후세 학자들은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사학자 이이화 씨는 자신의 책 '한국사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이때 말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오히려 일찍 잡혀 전쟁을 끝냈다면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한국사 이야기 제12권 219페이지)

현실을 외면한 외교정책으로 일관하다가 삼전도에서의 치욕스러운 항복으로 겨우 평화를 얻은 사실에 대한 질타라고 해야 할까? 사학자 이이화의 이 표현은 한 나라의 군주에 대한 표현치곤 너무도 냉정한 듯하기도 하다.

역사 속 과거와는 달리, 우린 지금 큰 눈이 언제, 얼마나 올지 예측할 수 있고, 어느 정도나마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큰 눈과 같은 재난은 여전히 언젠가는 역사가 될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을 변화시키는 큰 힘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 ‘대설’이 만들어낸 역사
    • 입력 2019.12.14 (07:07)
    취재K
‘대설’이 만들어낸 역사
한차례 미세먼지는 지나갔다.

하지만 올겨울에도 큰 눈이 있을지, 만일 있다면 언제 있을지 걱정도 돼서 포털 검색창에 '12월 날씨'를 쳐 봤다.

'대륙고기압의 영향으로 기온이 크게 떨어져 서해안을 중심으로 많은 눈이 내릴 때가 있겠습니다'

겨울이 되면, 폭설로 재난이 닥칠까 봐, 그래서 다치는 사람이나 재산 피해가 있을까 봐 걱정하는 현재의 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거 역사 속에는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이른바 '기설제'를 지냈던 때도 있었다.

포털 검색창에 '기설제'를 쳐봤다.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지속된 농경의례의 하나'라고 돼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눈이 와야 할 시기에 눈이 오지 않는 것 또한 천재라고 믿어 음력 11월과 12월에 기설제를 지냈다고 한다. 눈이 오는 횟수 또는 눈이 내린 양에 따라 이듬해가 풍년일지 흉년일지를 예측했기 때문에 눈을 내려 달라고 하늘에 제를 올린 것이다.

큰 눈으로 인해 빚어졌던 역사적 이벤트들이 어떤 것이 있나 알아보기 위해 이번엔 포털이 아니라 전자책으로 된 각종 역사 실록 등을 뒤져봤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과 백제 아신왕 사이의 그 치열했던 일진일퇴의 기록 속에, '폭설' 또는 '대설' 즉 큰 눈의 극적인 역할이 나온다.

출처 : 삼국사기(동서문화사 출판)출처 : 삼국사기(동서문화사 출판)

위 기사는 삼국사기 권 제25 백제본기에 나온 아신왕에 관한 것이다. 아신왕 4년(서기 395년) 가을 8월, 왕이 부하 진무 등을 시켜 고구려를 치게 했는데, 고구려 왕 담덕(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광개토대왕이다)이 친히 군사 7,000명을 이끌고 나와 맞서 싸워 백제군 8,000명이 죽었다는 기사가 먼저 나온다. 뒤이어 겨울인 11월에는 아신왕이 복수를 위해 다시 군사 7,000명을 이끌고 진군하는데, 이때 '회대설', 즉 큰 눈을 만나 얼어 죽는 병사들이 많으므로 결국 되돌아가 지친 군사들을 위로했다는 내용이다.

'삼국사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광개토대왕비'에는 새겨져 있는, 위 기사의 바로 다음 해, 즉 서기 396년의 이벤트까지 한 번 알아보자.

서기 396년, 광개토대왕은 바로 전 해에 고구려를 침범하려 했던 아신왕이 괘씸했는지 수군 수만 명을 배에 싣고 서해를 가로질러서 한반도에 있던 백제의 수도 한성을 침공한다. 아신왕은 고구려군이 수군까지 동원해 쳐들어올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지 대항하지 못하고 결국 굴복, 성문을 열고 나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했다고 한다.

만일 아신왕이 바로 그 전 해에 큰 눈만 만나지 않았다면 고구려 원정에 성공해 반대로 광개토대왕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삼국사기에 보면, 이렇게 큰 눈을 만나 회군을 할 수밖에 없어서 대업을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기사가 또 있다.


예를 들어 위 기사처럼 고구려 문자왕은 백제를 침공했다가 큰 눈을 만나 군사들의 손발이 얼어 터져 결국 되돌아와야 했고,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 역시 낙랑을 치다가 역시 큰 눈을 만나 바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큰 눈 덕분에 위기에서 빠져나온 경우도 있다.


위 기사는 고구려 제 2대 왕인 유리왕(주몽의 아들)때의 일이다.

유리왕 14년(기원전 6년) 당시 강국이었던 부여왕 대소가 유리왕에게 태자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지만 결국 보내지 않았다. 분노한 대소는 그해 겨울 군사 5만을 거느리고 침공해 왔지만, 큰 눈을 만나 병사들 중 동사자가 나오자 퇴각하고 만다.

큰 눈이 태자도 구하고(태자는 6년 뒤 죽어서, 유리왕의 뒤를 이을 운명은 아니었다) 나라도 구하고 결국 왕 자신도 구한 셈이다.

신라에서 '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이전에 '이사금'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적도 있는데(거서간 - 차차웅 - 이사금 - 마립간), 기원후 3세기 내해이사금 때에는 당시 백성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사금에 대한 연민이 생길 정도로 재난이 잇따랐다.

아래 기사는 내해이사금 당시를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내해 이사금 즉위 31년(서기 228년) 봄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7월에야 비가 와서 굶주린 백성들에게 창고의 곡식을 풀었다고 한다. 그해 10월에는 감옥에 들어가 있는 죄수 중에 죄질이 가벼운 사람들은 석방한다. 아마도 장기간의 가뭄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3년 뒤 가을에는 지진이 발생했고, 같은 해 10월에는 큰 눈이 내려 쌓인 눈의 깊이가 다섯 자, 즉 1m 50㎝나 됐다고 한다.

가뭄에 지진, 그리고 얼마 있다가 폭설까지... 이사금은 민심을 달래러 다니느라 진땀을 뺐을 것이다.

너무 걱정하고 과로를 해서였을까? 폭설이 내렸던 그다음 해 3월, 내해이사금은 죽고 만다.

그로부터 1,400년이 지난 12월의 어느 날 내렸던 큰 눈도, 당시 왕이었던 인조의 운명을 갈랐다.


우리는 2017년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을 통해 병자호란 당시 왕이었던 인조. 그리고 그의 신하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난을 겪었는지를 알고 있다.

그들이 청군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농성했던 기간은 47일간이었다. 다행히 이 영화 속에서는 왕과 신하들뿐 아니라 당시 민초들의 뼈저린 고통이 한겨울 매서운 추위와 쌓인 눈의 이미지 속에 잘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인조는 원래 남한산성에 오래 머무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1636년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는 급보를 받고 인조는 무조건 강화도로 도망가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나 청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미리 선점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마음을 바꿔 향한 곳이 바로 남한산성이었다.

12월 14일 밤 남한산성에 들어온 인조와 신하들은 또다시 마음이 바꿔 다시 강화도로 가기로 하게 된다. 그래서 다음날인 12월 15일 새벽, 인조는 말을 타고 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향하기 시작하는데, 그땐 이미 세찬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조가 탔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다고 한다.

결국엔 말에게 채찍까지 휘둘러, 끝내 말로 하여금 몇 걸음 떼게 했지만, 눈보라로 꽁꽁 얼어붙은 비탈길을 내려가다가 말이 넘어지고 말았다고 한다.(출처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제12권)

결국, 인조와 신하들은 시간이 지체돼서 그랬는지 강화도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만일 눈이 내리지 않아 강화도행이 성공했다면, 인조가 강화도로 갈 것을 예상하고 길목을 막고 있던 청군에게 틀림없이 붙잡혔을 것이라고 후세 학자들은 이야기하곤 한다. 하지만 사학자 이이화 씨는 자신의 책 '한국사 이야기'에서 이렇게 썼다.

"이때 말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하늘이 도운 것이라고들 말하지만, 오히려 일찍 잡혀 전쟁을 끝냈다면 피해가 적었을 것이다"(한국사 이야기 제12권 219페이지)

현실을 외면한 외교정책으로 일관하다가 삼전도에서의 치욕스러운 항복으로 겨우 평화를 얻은 사실에 대한 질타라고 해야 할까? 사학자 이이화의 이 표현은 한 나라의 군주에 대한 표현치곤 너무도 냉정한 듯하기도 하다.

역사 속 과거와는 달리, 우린 지금 큰 눈이 언제, 얼마나 올지 예측할 수 있고, 어느 정도나마 재난을 예방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시간은 흘렀지만 큰 눈과 같은 재난은 여전히 언젠가는 역사가 될 우리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전반을 변화시키는 큰 힘을 갖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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