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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리포트] 책 한권으로 중국 조롱거리 된 공안 간부
입력 2020.08.02 (07:00)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책 한권으로 중국 조롱거리 된 공안 간부
7월 27일 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7장의 사진과 함께 <평안경 平安經, 평안을 축원하는 책>이라는 책이 소개됐다. 그 이후 중국 인터넷에는 온통 그동안 한 번도 보도, 듣지도 못한 기서(奇书, 기이한 책)을 봤다며 시끄럽다. 급기야 중국 당국마저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평안경 平安經> 무슨 책이길래?

책이 출판된 건 2019년 12월이다. 출판 여덟 달 만에 갑작스레 화제가 됐는데, 이유는 우선 책 내용이 너무나도 황당하기 때문이다. 책은 전체 300여 페이지에 10장, 24만5천 자로 꾸며져 있다. 먼저 평안을 비는 대상과 장소를 쭉 열거하고 모든 글자 뒤에 평안(平安)을 붙였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제7장은 중국의 '공공장소 평안'을 기원한다. 첫 대목은 '중국공항'이다.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에서 시작해 14개 공항을 쭉 열거한다. 모든 공항 이름 뒤에 평안(平安)을 적었다. 그 공항의 평안을 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의 기차역 13곳, 주요 항구 10여 곳을 들고서는 '평안', 48개 아시아 국가 이름 뒤에도 평안(韓國 平安도 있다.). 나이별 별 평안 장에서는 1살 평안, 2살 평안, 3살 평안……. 쭉 해서 99살 평안. 신체 건강은 더 기가 차서, 코 평안, 입 평안, 목 평안 이런 식이다.

저자는 누구?

저자는 이처럼 중국뿐 아니라 우주, 인류 문명, 삼라만상, 세계 각국의 평안을 두루 기원했다. 평안을 빌어주니 감사하다고 하기에는 책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당장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도 '수준 이하' '터무니없다' '초등학생도 쓰겠다'는 조롱이 넘쳐났다. 중국의 한 블로거는 "천하의 이런 기이한 책이 있다니, 나를 때려죽여도 믿지 못하겠다. (打死我也不敢相信,天下竟有这本奇书!)'고 황당해했다.


그런데 중국 네티즌들을 더 놀라게 한 건 이 책의 저자다. 저자는 중국 지린(吉林)성 공안청 부위원장 겸 상무 부청장 허뎬(賀電)이다. 지린성 공안 2인자가 저자인 거다. 중국 포털 바이두(百度)에 나온 허뎬의 이력을 보면 1963년생으로 올해 57살이다.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로 중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하다.

지린성 공안청은 중국 매체의 취재 요청에 "허뎬 상무 부청장이 한가한 시간에 개인적으로 창작한 것으로, 업무에 바빠 인터뷰에 응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정도라면 한 기이한 공직자의 개인 취미가 출판이라는 이름으로 새 나와 생긴, 웃고 넘길 일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근데 중국 민심에 불을 지른 일이 또 드러났다.


<평안경, 平安經> 낭송회까지 열려

지린성 성 정부 까지 나서 대대적으로 책을 홍보하고 '평안경 낭송회'까지 열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현지 매체 지린일보는 6월 7일 지린성 성도 창춘(長春)에서 '평안경 공익 낭송 및 토론회'가 열려, 참석한 저명한 학자와 시인, 고위 공무원들이 '평안경'을 칭송했다고 보도했다.

지린성 산하 기관들은 웨이보 등 SNS 공식 계정을 통해 '평안경'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중국 지린 망 등 성 정부 공식 계정에는 "평안경을 읽어 초심의 사명을 일깨우고, 학자가 읽으면 평안의 철학을 일깨울 수 있다"는 '평안경 암기 소감'이 올라왔다. 또 "상인이 이 책을 읽으면 기업의 걱정이 없고, 일반인이 읽으면 태평을 누릴 수 있다"는 서평도 있다.

책값도 도마 위에 올랐다. 중국에선 보통 책 한 권 값이 50 위안(우리 돈 8,500원) 안팎인데 평안경은 인터넷 판매 가격이 269 위안(45,000원) ~ 299 위안(50,000원)으로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불똥이 출판사로까지 옮겨붙자, 책 출판사로 지목된 인민출판사는 "평안경이라는 책을 출판한 적이 업고, 어떤 기관과도 책을 출판하기로 동의한 적도 없다"고 공식 해명했다. 인민출판사는 중국 공산당 '1호 출판사'다.


중국 당국, 대대적인 조사 착수

황당무계한 책에 대한 조롱으로 시작한 중국 민심은 권력의 사적인 이용, 관료조직의 부정부패, 맹목적인 권력 숭배 등 이 사안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중국 당국도 대대적인 조사를 발표했다. 지린성 정법위원회는 합동조사팀을 꾸려 '평안경'과 관련한 문제를 확인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틀 전인 31일 책 한 권 때문에 허뎬 부청장은 면직됐다.

지난 일주일 사이 14억 인구 중국에서 아마도 가장 큰 낭패를 당한 사람을 꼽자면 허뎬 지린성 공안청 부청장일 거다. 정작 허뎬 씨는 '평안경'에서 자신의 평안은 빌지 못했나 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권력에 취한 한 실력자의 오만이 스스로 불러온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말에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고 했다.
  • [특파원리포트] 책 한권으로 중국 조롱거리 된 공안 간부
    • 입력 2020.08.02 (07:00)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책 한권으로 중국 조롱거리 된 공안 간부
7월 27일 밤,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7장의 사진과 함께 <평안경 平安經, 평안을 축원하는 책>이라는 책이 소개됐다. 그 이후 중국 인터넷에는 온통 그동안 한 번도 보도, 듣지도 못한 기서(奇书, 기이한 책)을 봤다며 시끄럽다. 급기야 중국 당국마저 대대적인 조사에 나섰다.

<평안경 平安經> 무슨 책이길래?

책이 출판된 건 2019년 12월이다. 출판 여덟 달 만에 갑작스레 화제가 됐는데, 이유는 우선 책 내용이 너무나도 황당하기 때문이다. 책은 전체 300여 페이지에 10장, 24만5천 자로 꾸며져 있다. 먼저 평안을 비는 대상과 장소를 쭉 열거하고 모든 글자 뒤에 평안(平安)을 붙였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제7장은 중국의 '공공장소 평안'을 기원한다. 첫 대목은 '중국공항'이다. 베이징 서우두국제공항에서 시작해 14개 공항을 쭉 열거한다. 모든 공항 이름 뒤에 평안(平安)을 적었다. 그 공항의 평안을 빈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중국의 기차역 13곳, 주요 항구 10여 곳을 들고서는 '평안', 48개 아시아 국가 이름 뒤에도 평안(韓國 平安도 있다.). 나이별 별 평안 장에서는 1살 평안, 2살 평안, 3살 평안……. 쭉 해서 99살 평안. 신체 건강은 더 기가 차서, 코 평안, 입 평안, 목 평안 이런 식이다.

저자는 누구?

저자는 이처럼 중국뿐 아니라 우주, 인류 문명, 삼라만상, 세계 각국의 평안을 두루 기원했다. 평안을 빌어주니 감사하다고 하기에는 책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당장 중국 네티즌 사이에서도 '수준 이하' '터무니없다' '초등학생도 쓰겠다'는 조롱이 넘쳐났다. 중국의 한 블로거는 "천하의 이런 기이한 책이 있다니, 나를 때려죽여도 믿지 못하겠다. (打死我也不敢相信,天下竟有这本奇书!)'고 황당해했다.


그런데 중국 네티즌들을 더 놀라게 한 건 이 책의 저자다. 저자는 중국 지린(吉林)성 공안청 부위원장 겸 상무 부청장 허뎬(賀電)이다. 지린성 공안 2인자가 저자인 거다. 중국 포털 바이두(百度)에 나온 허뎬의 이력을 보면 1963년생으로 올해 57살이다.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재로 중국 공산당 당원이기도 하다.

지린성 공안청은 중국 매체의 취재 요청에 "허뎬 상무 부청장이 한가한 시간에 개인적으로 창작한 것으로, 업무에 바빠 인터뷰에 응하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 정도라면 한 기이한 공직자의 개인 취미가 출판이라는 이름으로 새 나와 생긴, 웃고 넘길 일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근데 중국 민심에 불을 지른 일이 또 드러났다.


<평안경, 平安經> 낭송회까지 열려

지린성 성 정부 까지 나서 대대적으로 책을 홍보하고 '평안경 낭송회'까지 열렸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현지 매체 지린일보는 6월 7일 지린성 성도 창춘(長春)에서 '평안경 공익 낭송 및 토론회'가 열려, 참석한 저명한 학자와 시인, 고위 공무원들이 '평안경'을 칭송했다고 보도했다.

지린성 산하 기관들은 웨이보 등 SNS 공식 계정을 통해 '평안경'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중국 지린 망 등 성 정부 공식 계정에는 "평안경을 읽어 초심의 사명을 일깨우고, 학자가 읽으면 평안의 철학을 일깨울 수 있다"는 '평안경 암기 소감'이 올라왔다. 또 "상인이 이 책을 읽으면 기업의 걱정이 없고, 일반인이 읽으면 태평을 누릴 수 있다"는 서평도 있다.

책값도 도마 위에 올랐다. 중국에선 보통 책 한 권 값이 50 위안(우리 돈 8,500원) 안팎인데 평안경은 인터넷 판매 가격이 269 위안(45,000원) ~ 299 위안(50,000원)으로 터무니없이 비쌌기 때문이다.

불똥이 출판사로까지 옮겨붙자, 책 출판사로 지목된 인민출판사는 "평안경이라는 책을 출판한 적이 업고, 어떤 기관과도 책을 출판하기로 동의한 적도 없다"고 공식 해명했다. 인민출판사는 중국 공산당 '1호 출판사'다.


중국 당국, 대대적인 조사 착수

황당무계한 책에 대한 조롱으로 시작한 중국 민심은 권력의 사적인 이용, 관료조직의 부정부패, 맹목적인 권력 숭배 등 이 사안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자 중국 당국도 대대적인 조사를 발표했다. 지린성 정법위원회는 합동조사팀을 꾸려 '평안경'과 관련한 문제를 확인하고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틀 전인 31일 책 한 권 때문에 허뎬 부청장은 면직됐다.

지난 일주일 사이 14억 인구 중국에서 아마도 가장 큰 낭패를 당한 사람을 꼽자면 허뎬 지린성 공안청 부청장일 거다. 정작 허뎬 씨는 '평안경'에서 자신의 평안은 빌지 못했나 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권력에 취한 한 실력자의 오만이 스스로 불러온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옛말에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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