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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댓말의 무게’…판결문 이어 공공기관 계약서도 탈바꿈
입력 2020.08.02 (09:00) 취재K
‘존댓말의 무게’…판결문 이어 공공기관 계약서도 탈바꿈
지난 5월 '존댓말 판결문'이 화제가 됐습니다. 70여 년의 관행을 깬 판결문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달부터 개인이나 기관에 통지되는 결정문의 문체를 존댓말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판결문을 바꾼 이인석 대전고법 판사는 앞서 언론 인터뷰에서 "판결문을 받아보는 분은 국민이고, 나라의 주인에게 판결문을 보내는 데 존댓말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결정문을 바꾸기로 한 인권위는 진정인이나 피진정인처럼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서라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 공공기관 '존댓말 계약서' 등장

공공기관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싹 트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며 계약 업무를 담당해 온 김수호 씨는 지난 5월부터 민간 부문과 계약할 때 쓰이는 계약서의 부속 서류를 존댓말로 바꿔서 작성하고 있습니다.

가령 "본 과업지시서에 명시되지 않은 세부 사항은 우리 공사의 지시에 따른다"를 "본 과업설명서에 명시되지 않은 세부 사항은 공사의 과업 내용에 의거하시기 바랍니다"로 바꿨습니다. 보시다시피 '지시'도 '설명'으로 바꿨습니다.

김 씨는 "우리가 계약을 발주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계약 당사자인 개인·민간 기업도 시민"이라며, "갑을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인 만큼 당연히 존댓말로 쓰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과의 계약인 근로계약서 등은 특히 신경 쓴다고 합니다.


존댓말은 글자 수가 많아 비경제적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한 문장에 한두 글자 늘어나는 거라 부담이 크지 않고, 무엇보다 존댓말 계약서로 서로 신뢰가 강해진다면 오히려 경제적인 게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같은 계약 서류를 받아 본 조효금 씨는 "계약서는 원래 반말이다 보니 껄끄러운 느낌이 들어도 그러려니 해 왔는데, 막상 존댓말 계약서를 받아 보니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고 말했습니다.

■ 반론도 제기..."계약서라는 문서 특수성 생각해야"

김 씨는 국민신문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담당 부처인 기획재정부는 계약서를 경어체로 바꾸기 위해 표준계약서를 첨부한 시행규칙을 일일이 바꾸는 것은 곤란하다며, "반말체(평어체)라고 해서 명령형은 아니기 때문에 갑질을 수반하는 문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표준하도급계약서 같은 다른 법의 계약서도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 만큼, 법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재부만 바꿀 수는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직 '존댓말 계약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정부의 물자 구매와 계약 등을 담당하는 조달청 역시 "공공기관 표준계약서에서 존댓말을 써야 한다, 반말을 써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존댓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쌍방 간의 계약 사실, 의무이행을 확약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계약서라는 문서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 '갑과 을' 대신 '동과 행'

반면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군사정부 시절 '군관민'이라는 표현이 지금은 '민관군'이 됐듯, 민(民)을 중시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시대 요구에 맞는 바람직한 변화"라고 평가했습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전달 도구가 아니라 뉘앙스와 태도가 스며있는 것이기 때문에, 존댓말을 통해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계약서에서 '갑과 을'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입니다. 서울시와 강서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갑을'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충청북도는 '갑과 을' 대신 '동과 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갑과 을'이라는 단어는 단지 계약 당사자를 의미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뉘앙스가 스며든 점을 고려한 조치입니다.

김수호 씨는 "표준계약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임의로 계약서를 존댓말로 바꾸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 기관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며 "존댓말의 무게를 고려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그 합의를 논의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 ‘존댓말의 무게’…판결문 이어 공공기관 계약서도 탈바꿈
    • 입력 2020.08.02 (09:00)
    취재K
‘존댓말의 무게’…판결문 이어 공공기관 계약서도 탈바꿈
지난 5월 '존댓말 판결문'이 화제가 됐습니다. 70여 년의 관행을 깬 판결문이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이달부터 개인이나 기관에 통지되는 결정문의 문체를 존댓말로 바꾸기로 했습니다.

판결문을 바꾼 이인석 대전고법 판사는 앞서 언론 인터뷰에서 "판결문을 받아보는 분은 국민이고, 나라의 주인에게 판결문을 보내는 데 존댓말을 쓰는 게 더 자연스럽다"고 말했습니다. 결정문을 바꾸기로 한 인권위는 진정인이나 피진정인처럼 외부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서라는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습니다.

■ 공공기관 '존댓말 계약서' 등장

공공기관에서도 이런 분위기가 싹 트고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공공기관에서 일하며 계약 업무를 담당해 온 김수호 씨는 지난 5월부터 민간 부문과 계약할 때 쓰이는 계약서의 부속 서류를 존댓말로 바꿔서 작성하고 있습니다.

가령 "본 과업지시서에 명시되지 않은 세부 사항은 우리 공사의 지시에 따른다"를 "본 과업설명서에 명시되지 않은 세부 사항은 공사의 과업 내용에 의거하시기 바랍니다"로 바꿨습니다. 보시다시피 '지시'도 '설명'으로 바꿨습니다.

김 씨는 "우리가 계약을 발주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계약 당사자인 개인·민간 기업도 시민"이라며, "갑을 관계가 아닌 협력 관계인 만큼 당연히 존댓말로 쓰는 게 맞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과의 계약인 근로계약서 등은 특히 신경 쓴다고 합니다.


존댓말은 글자 수가 많아 비경제적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한 문장에 한두 글자 늘어나는 거라 부담이 크지 않고, 무엇보다 존댓말 계약서로 서로 신뢰가 강해진다면 오히려 경제적인 게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 같은 계약 서류를 받아 본 조효금 씨는 "계약서는 원래 반말이다 보니 껄끄러운 느낌이 들어도 그러려니 해 왔는데, 막상 존댓말 계약서를 받아 보니까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 좋더라"고 말했습니다.

■ 반론도 제기..."계약서라는 문서 특수성 생각해야"

김 씨는 국민신문고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 같은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담당 부처인 기획재정부는 계약서를 경어체로 바꾸기 위해 표준계약서를 첨부한 시행규칙을 일일이 바꾸는 것은 곤란하다며, "반말체(평어체)라고 해서 명령형은 아니기 때문에 갑질을 수반하는 문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표준하도급계약서 같은 다른 법의 계약서도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지 않은 만큼, 법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기재부만 바꿀 수는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아직 '존댓말 계약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고도 덧붙였습니다.

정부의 물자 구매와 계약 등을 담당하는 조달청 역시 "공공기관 표준계약서에서 존댓말을 써야 한다, 반말을 써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건 아니다."라면서도 "존댓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쌍방 간의 계약 사실, 의무이행을 확약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계약서라는 문서의 특수성을 생각해야 한다는 겁니다.

■ '갑과 을' 대신 '동과 행'

반면 국립국어원 관계자는 "군사정부 시절 '군관민'이라는 표현이 지금은 '민관군'이 됐듯, 민(民)을 중시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시대 요구에 맞는 바람직한 변화"라고 평가했습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전달 도구가 아니라 뉘앙스와 태도가 스며있는 것이기 때문에, 존댓말을 통해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계약서에서 '갑과 을'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고 있는 것도 비슷한 문제의식입니다. 서울시와 강서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갑을'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있고, 충청북도는 '갑과 을' 대신 '동과 행'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래 '갑과 을'이라는 단어는 단지 계약 당사자를 의미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새로운 뉘앙스가 스며든 점을 고려한 조치입니다.

김수호 씨는 "표준계약서가 바뀌지 않는 이상 임의로 계약서를 존댓말로 바꾸기가 쉽지는 않지만, 우리 기관에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노력해 보겠다"며 "존댓말의 무게를 고려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그 합의를 논의해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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